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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초조함과 느낌병이 온전하여도 “살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날짜17-07-10 13:27 추천추천 :0 조회수2,515

본문

불안 초조함과 느낌병이 온전하여도 살자

                                                          김** 동료지원활동가

 

 

안녕하세요. 저는 한울지역정신건강센터를 다니고 있는 김**입니다. 저는 충청북도 보은에서 태어나 거기서 16살쯤에 어머니와 저, 누나가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나도 이제 서울 가서 돈을 벌 수 있겠다. 부푼 마음으로 어머니 저, 누나 모두 공장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어머니와 누나는 일을 잘 했지만 저는 눈치가 없고 빠릿빠릿 일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형들에게 많이 맞았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공장에 있는 형들의 텃세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장을 퇴사하고 집안에만 있게 되었습니다. 2년 동안 있다가 느낌병이 발병하게 되었습니다. 느낌병의 증상은 야한영화를 보면 드는 느낌을 제가 다른 사람에게 그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느낌은 제가 주고 싶고, 안주고 싶고를 떠나서 제 마음대로 안 되고 제멋대로 느낌이 갑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무슨 이유로 이런 말도 안 되는 느낌을 남에게 주겠습니까? 사실 이 느낌을 주는 병은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아무 때나 상관없이 다 줍니다. 그래서 2년 동안 집에 있다가 큰 누나가 저에게 정신병인 걸 알아서 구로공단 옆에 있는 강남성심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저는 무서웠습니다. 아무래도 직원이 때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말썽을 부리지 않는 한 때리지도 않고 묶지도 않았습니다. 그 병원에서 80% 병이 나았고 퇴원을 하였는데 곧바로 다른 병이 찾아 왔습니다. 불안초조라는 병인데 그 병이 찾아오면 4~5시간동안 여름에도 상관없이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괴로워했어야 했습니다. 약을 잘 먹으면서 불안초조는 거의 잡혔는데, 그러면 다시 느낌병이 시작되었습니다. 느낌병 초기에는 어머니를 정말 많이 괴롭혔습니다. 어머니가 늦게 들어오면 왜 늦게 들어왔어?”라고 되지도 않는 트집을 잡곤 했습니다. 또 제가 통닭이나 족발이 먹고 싶으면 조그만 트집을 잡아 그것을 부풀려서 큰소리로 사오라고 하고 사오면 누나와 어머니는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며 우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저와 누나와 다른 곳에 따로 살게 되었습니다. 누나와 제가 전셋집에 같이 사는데 주변 이웃의 시선이 별로 안 좋았습니다. 누나들과 같이 살면서 불안 초조병이 다시 시작되고 느낌병이 줄었습니다.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불안초조가 하루에 한 번씩 꼭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새벽 2시가 되던, 3시가 되던 강남성심병원 응급실에 가서 진정제 주사를 한 대 맞았는데 계속 진정제를 맞다보니 두 대로 늘어났습니다. 또 누나들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집에 와서 잠을 자야 하는데 제가 새벽에 택시를 타고 불안초조 때문에 응급실에서 진정제를 맞아야 하니 얼마나 누나들이 피곤하겠습니까? 정신병원에 입원 시킬 돈은 없고 고심하던 끝에 어느 목사님이 충남 논산 성지원이란데가 있는데 한 달에 5만원만 주면 먹여주고 재워주고 정신과 약도 준다기에 저로 인해 다급했던 큰 누나는 저를 그쪽으로 보내기로 마음을 먹고 저에게는 그냥 시골인데 냇물도 흐르고 초가집에서 편히 1년만 지내다 오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누나들에게 부담을 너무 많이 줬기 때문에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큰누나와 누나친구, 저가 봉고차를 모는 형과 같이 가는데 저에게 슬리퍼를 신겨서 좀 의아해 했습니다. 속으로 설마 나쁜 데겠어?’ 생각했는데 그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충남 논산 성지원에 도착했는데 겉에는 꽃도 있고 아주 좋지만 그 속에는 지옥이었습니다. 희망반이란 곳에 들어갔는데 문이 감옥 같은 창살로 되어있고 그때서야 눈치를 챘습니다. ‘아 내가 잘 못 들어 왔구나. 반장이라는 원생이 있는데 그 사람은 알코올로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은 밥을 먹을 때 굉장히 사나워집니다. 조금만 잘 못해도 손과 발을 묵고 발바닥 10대를 있는 힘껏 때립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30부 까지 씻고 쇼핑백 만들 준비를 하고 6시에 아침 밥 먹고 본격적으로 쇼핑백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반장이 희망반에서 원생이지만 총책임자인데 자기 방에서 누워 자기에 처음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저는 반장을 깨우고 왜 일을 안 하냐고 말을 했는데 반장이 일어나더니 저를 오라고 손짓을 하고 방에서 저의 뺨을 20대 이상 쉴 새 없이 때렸습니다. 저는 계속 죄송합니다.’만 말하고 무서워서 대항을 못했습니다. 그리고 손을 뒤로 묶고 발도 묶고 무릎을 꾸린 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작업반장이란 사람이 발로 저의 명치를 가격해서 숨을 좀 못 쉬었습니다. 밥도 오래된 쌀로 했는지 밥이 역겨웠습니다. 국도 미역국인데 정말 맛도 없었고요. 반찬은 짠무 썬것에 고춧가루 묻힌 것으로 반찬을 주었는데 1주일정도는 굶었고 배가 고파 그냥 먹었습니다. 다른 원생들은 밥과 반찬과 국을 더 먹으려고 줄을 서는 사람도 있었는데 저는 의아해했습니다. 감독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정상인이고 모든 남자원생들을 관리하고 때리고 묶고 보호실에 가두고 아무튼 감독이란 사람은 원생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저녁 조리시간에 약을 먹고 반장이 이사람, 저 사람이 말 안 듣고 말썽을 일으켰습니다라고 감독에게 말하면 주먹으로 잘못한 원생의 머리를 때리고 각목으로 엉덩이를 때리기도 합니다. 저녁 조회는 정말 두렵습니다. 하루도 감독이 원생을 안 때리는 날이 없습니다. 저도 불안초조 때문에 감독이 저의 몸을 발로 밟은 적도 있고 감독에게 계속 불안초조하다고 말을 하니깐 그렇게 때렸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서 지저분한 욕실 타일을 닦는 크레졸을 죽으려고 세 모금 마셨더니 바로 토하고 00병원에 가서 위세척하고 다시 성지원으로 와서 있는데 매일 일상이 감독과 작업반장, 반장, 방장 사람들이 원생들을 때리고 쓰레기라고 하고 욕도 하였습니다. 저는 정말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절망적인 생각 끝에 가위를 들고 화장실로 가서 가위로 배를 세 번 찌르고 했더니 반장이 감독을 불러 병원 중환자실로 가서 꿰매고 치료를 받았습니다. 저의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도 혼자 말하고 소리 지르고 그렇게 하니까 제가 또 자살을 할까봐 36개월 만에 그 지옥 같은 성지원에서 나왔습니다. 갑자기 왜 나왔냐면 제가 성지원에서 죽으면 성지원에서 장사비 100만원을 내야 하기 때문에 저를 퇴소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춘천국립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은 천국이었습니다. 맛있는 밥, 반찬, , 담배도 마음대로 피울 수 있고 일도 안 해도 되고, 거기서 1년 동안 먹고, 자고 하면서 72kg에서 100kg이 넘게 몸무게가 나왔습니다. 춘천병원에서 어머니에게 잘 못한 일이 생각나 1년 있는 동안 6개월은 매일 울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용서의 편지도 성심성의껏 몇 십 통 보내고 그거에 감동을 받은 큰 매형은 시계를 선물로 줘서 감사했습니다. 춘천병원을 퇴원하고 목사님 집, 교회 그리고 어머니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성지원이 나쁜 곳이지만 저에게는 어머니의 소중함을 느끼는 시간이 되어서 그것으로 봤을 땐 배울 점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울센터에 다니고 있고 조리와 동행, 공익 강사, 다가서기/관계 맺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도 저를 의지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쭉 어머니와 같이 오순도순 잘 살고 어머니의 소중함을 알고 어머니를 잘 모시고 살겠습니다. 요즘에는 어머니가 우울증과 환청이 있으셔서 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저 때문에 그런가 하는 생각에 어머니께 죄스러운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서 어머니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나 중심적으로 살아서 어머니와 누나를 많이 괴롭혔는데 지금은 어머니 중심적, 누나들 중심적으로 바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누나와 어머니 중심적으로 되는 것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니 누나들의 신임이 바닥이었던 제가 누나들의 칭찬도 받고 어머니도 저를 의지하고 요즘에는 어머니와 잘살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나그네길이고 천국에서 영원한 기쁨을 맛보며 예수님을 믿으며 열심히 자살을 살자로 바꾸고 열심히 살고자합니다.

제가 한울센터에 온지 어느덧 86개월이 되었습니다. 처음 왔을 때에는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회원들과 대화를 잘 하지 못하고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였습니다. 선생님들의 배려와 보살핌으로 성격이 점점 외향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무언가의 물음에 저요!”라고 대답했다가라고요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여 회원들이 웃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흐뭇했습니다. 이렇게 지내던 어느날 전에 계시던 박정식 선생님이 저에게 와서 동행을 해보지 않겠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느낌병이라는 증상이 있었는데 그 증상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증상이기 때문에 불안해서 안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박정식 선생님의 여러 번의 권유 끝에 동행을 할 마음을 먹었습니다. 동행의 방법을 들었을 때 간식비가 1인당 2000원 동행 한 번 하는데 5000원의 사례비가 나온다고 하였지만 저의 본심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간식도 먹고 사례비 5000원도 받고 이용자의 상태나 증상은 생각해 보지 않은 채 우선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였습니다. 증상도 무시한 채 맛있게 먹고 놀아야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드디어 동행을 시작하였습니다. 동행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말도 잘 못하고 불안, 초조 증상이 찾아왔습니다. 그렇지만 동행을 처음 시작하는 것이고 이 활동을 무사히 잘 끝내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이용자 박 00씨와 동해을 잘해보자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먼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머뭇 거리다가 한 마디씩 하면 박 00씨는 , 아니오로만 대답을 하여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처음부터 복병을 만났다.’라고 생각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이용자를 대했습니다. 마음을 비우니까 부담이 없어지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저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 제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어봤는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다. 그리고 박 00씨의 증상 중 머리가 빨개진다는 증상이 있는데 커피, 담배와 음료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없으면 그 곳에는 절대 가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머리가 빨개진다고 합니다. 영화도 못 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 아니오를 안하는 다른 방법을 김아진 선생님께서 ?”라는 말을 자주 물어 보라고 하셔서 물어봤더니 그 ?”라는 말을 자주 물어 보라고 하셔서 물어봤더니 그 ?”라는 말의 효과는 컸습니다. 이분은 동행 때 거의 무표정이신데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한 번의 미소와 웃음을 짓는 얼굴을 볼 때 저는 정말 기뻤습니다. 동행활동도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성실히 참여해주어서 감사했습니다. 이용자의 어머니께서 한울에 같이 오셔서 신림 포도몰에 가서 햄버거도 사주셨습니다. 또 한 번은 이용자의 집에서 수련선생님과 같이 가서 볶음밥을 해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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